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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산이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높은 봉우리일 뿐인데, 막상 그 산을 오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달라진다. 나에게 그 산은 지난연휴 때 다녀온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이었다.
등산을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봄바람이 불어오던 날 친구의 제안으로 무심코 따라나선 여정이었다. 그러나 그 무심한 한 걸음이 어느새 나를 흔들고 있었다.
용문산은 해발 1,157m로 경기도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다. 생각보다 위엄 있는 산세를 자랑한다. 그곳의 초입에서 나는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은행나무 앞에 섰다. 수령 1,100년 이상, 높이 40미터가 넘는 거목은 그 자체로 말이 없었다.
용문산은 신라 신덕왕 2년(913년)에 창건된 사찰 용문사와 함께 역사와 시간을 함께 품고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과 삼층사리탑, 나한상이 모셔진 미소전 등 고즈넉한 공간들이 등산객을 맞는다. 그 안에서 나는 문득 ‘시간을 버틴다는 것’에 대해생각하게 되었다. 나무도, 사찰도, 바위도, 그리고 저 멀리 지나간 사람들도 그 시간 속에 무엇을 지키고 있었을까. 바쁘게만 살던 내 일상 속에서는 쉽게 할 수 없던 질문이었다.
등산로는 마당바위, 가섭봉을 지나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왕복 8.1km, 순수 등산 시간만 3시간이 넘는 길이었다. 헉헉대며 돌길을 오르며 나와 묵묵히 대화를 나눴다.‘이렇게까지 올라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중간에 만난 이름 모를 계곡과 휘청거리며 웃던 사람들의 모습이 내 의지를 조금씩 붙잡았다. 그리고 가섭봉 정상에 올랐을 때, 그곳에는 그저 바람뿐이었다. 세상을 다가진 듯한 풍경은 없었지만, 가슴 속 무언가가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하산길에 마주한 청춘뮤지엄이라는 복고테마 전시관에 들렀다. 1980-90년대 학창 시절의 물건과 풍경들이 반갑게 맞았다. 그것은 내 삶 이전의 시대이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하고 따뜻했다. 누군가의 청춘이었던 시간이 지금의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용문산 아래 식당에서 맛본 더덕구이와 쌈밥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고된 산행 후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그 한 끼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달래주었다. 오롯이 자연 속에서 걷고, 보고, 먹고, 쉰 하루. 나는 그날, 내가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하나씩 주워 담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것’을 본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 용문산 여행을 통해, 오히려 오래된 것을 통해 ‘새롭게 느낀 것’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깨달음은 ‘버팀’이었다. 오래된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듯이 나도 내 삶의 어떤 가치들에 대해 더 단단히 뿌리내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높이보다는 깊이가 중요하다는, 당연하지만 잊고 살아온 교훈이었다.
글·사진 이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