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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어제 사랑했던 사람이 낯선 타인이 되어 있다면 그 사랑은 정말 끝난 것일까.
2025년 12월 24일 개봉한 한국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일본 작가 이치조 미사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청춘멜로의 외형을 지니고 있지만, 감정의 크기보다 사랑을 지속하는 방식에 더 깊이 시선을 둔다.
영화의 중심에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여고생 ‘한서윤’이 있다. 그녀는 잠들면 전날의 기억을 잃는다. 감정도, 약속도, 고백도 모두 사라진다. 그래서 서윤의 하루는 늘 처음이다. 책상 위 메모와 휴대전화 속 사진, 그리고 스스로 써 내려간 일기가 유일한 단서로 남는다. 어제의 서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오늘의 서윤이 세상을 다시 이해해 간다. 사랑 역시 예외가 아니다.
‘김재원’은 그런 서윤의 세계에 들어온다. 무기력하게 하루를 흘려보내던 재원은 우연한 계기로 서윤과 ‘가짜 연애’를 시작하지만, 관계는 점차진짜 감정으로 깊어져 간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관계는 더 위태로워진다. 재원이 아무리 진심을 건네도, 다음 날이면 서윤은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마주한다. 매일 다시 고백하고 처음부터 설명하며 같은 선택을 반복해야 한다. 사랑이 축적되지 않는 세계에서 사랑은 오직 오늘의 행동으로만 증명된다.
이 영화의 갈등은 거대한 사건이아니라 두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의 방식에서 시작된다. 기억상실이라는 설정은 극적인 장치이지만, 그로 인해 드러나는 감정은 오히려 우리의 일상과 닮아 있다. 우리는 쉽게 어제의 다짐을 잊고,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 믿으며 감정의 지속을 당연하게 여긴다.
영화는 그 익숙함을 뒤흔든다. 기억이 사라진다면 사랑은 계속될 수 있을까. 매일 처음으로 돌아가는 관계 앞에서 우리는 같은 선택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영화의 연출은 감정을 과장하기보다 반복을 통해 차분히 쌓아 올린다. 같은 인사, 같은 교실, 같은 골목길이 이어지지만 그 안의 표정과 시선은 조금씩 달라진다. 배우 신시아가 연기한 서윤은 매 순간이 처음인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품은 내면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배우 추영우가 연기한 재원 역시 냉소적인 청춘에서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수고를 감수하는 인물로 서서히 변화해 간다. 감정은 격렬하게 폭발하기보다 조용히 스며들고, 관객은 그 미묘한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된다.
이 작품이 단순한 눈물 멜로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청춘의 불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목표 없이 흔들리는 재원의 일상, 병을 안은 채 미래를 가늠해야 하는 서윤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10대와 20대의 불확실성과 겹쳐진다. 관계는 쉽게 시작되지만 쉽게 단절되고, 내일은 늘 불안정하다. 기억상실이라는 극단적 설정은 빠르게 소비되고 잊혀지는 시대의 관계를 은유처럼 보여준다.
영화는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사랑을 붙들려는 두 인물의 모습을 비춘다. 메모를 남기고,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는 장면은 병을 보완하는 장치를 넘어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의 상징으로 읽힌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감정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선택임을 영화는 조용히 환기한다.
결국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거대한 사건보다 오늘 하루의 무게를 응시한다. 내일이면 잊힐지라도 오늘만큼은 진심을 다해 마음을 건네는 순간들, 그 선택이 반복될 때 사랑은 형태를 갖는다. 사랑은 기억될 때에만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기억되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는가. 영화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는다. 다만 잊힐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선택하는 태도가 사랑일지 모른다는 여운을 남긴다.
글 박수현 기자